Part 1. 연필을 다시 이해해야 하는 이유
연필은 가장 익숙한 미술 재료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연필을 특별히 공부할 필요가 없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처음에는 연필은 다 똑같다고 느꼈다. 집에 있는 연필이나 문구점에서 산 연필로 그냥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를 찾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연필의 차이가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연필은 단순히 검은 선을 만드는 도구가 아니다. 연필은 선의 성격을 결정한다. 선이 가볍게 느껴질지, 무겁게 느껴질지, 날카로울지, 부드러울지를 연필이 먼저 정한다. 손은 그 결정을 따라갈 뿐이다. 이 사실을 모르면 선 표현이 늘 불안정하게 느껴진다.
초보자가 연필로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선이 너무 진해요”, “선이 지저분해요”, “지우개를 쓰면 더 더러워져요”. 이 말 속에는 공통된 착각이 숨어 있다. 선의 문제를 손의 문제로만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연필의 성질을 모르고 사용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인 경우가 훨씬 많다.
연필에는 분명한 성격 차이가 있다. 어떤 연필은 아주 가볍게 닿아도 선이 강하게 나온다. 어떤 연필은 힘을 주지 않으면 선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 차이를 모른 채 그림을 그리면, 항상 힘 조절에만 신경을 쓰게 된다. 그러다 보면 그림 자체에 집중하기 어려워진다.
나는 연필을 이해하기 전에는 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선이 안 보일까 봐 눌러 그렸고, 그 결과 화면은 금방 지저분해졌다. 지우개를 쓰면 종이는 상했고, 다시 그리면 더 어색해졌다. 그때는 내가 연습이 부족하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연필을 바꾸고 나서 같은 손으로 같은 선을 그렸을 때, 결과는 놀라울 정도로 달라졌다.
연필의 가장 큰 특징은 경도 차이다. 연필에는 H 계열과 B 계열이 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숫자 구분이 아니다. 선의 성질 자체를 바꾼다. 단단한 연필은 선이 가볍고 정리된 느낌을 준다. 부드러운 연필은 선이 진하고 감정적인 느낌을 만든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표현은 늘 어딘가 어긋난다.
연필을 잘 쓰는 사람은 손이 특별해서가 아니다. 연필의 성격을 알고 그에 맞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형태를 잡을 때 어떤 연필이 필요한지 알고, 명암을 넣을 때 어떤 연필이 필요한지 알고 있다. 이 판단이 선을 안정적으로 만든다.
연필은 수정이 쉬운 재료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연필도 잘못 쓰면 수정이 어려워진다. 너무 부드러운 연필로 처음부터 강하게 그리면 지우개로도 흔적이 남는다. 이 경험을 한 초보자는 연필조차 다루기 어렵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 문제 역시 연필의 성질을 몰랐기 때문에 생긴다.
연필을 이해하면 선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달라진다. 선을 한 번에 완성해야 한다는 부담이 줄어든다. 가볍게 시작하고, 필요할 때 점점 선을 키워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여유는 그림 전체를 훨씬 편안하게 만든다.
이 파트에서는 연필을 왜 다시 봐야 하는지에 집중했다. 다음 파트에서는 연필의 경도 구분이 실제 선 표현에서 어떤 차이를 만드는지, 초보자가 체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것이다.

Part 2. 연필 경도(H·B)가 선에 미치는 실제 차이
연필의 차이를 가장 명확하게 나누는 기준은 경도다.
연필에 적혀 있는 H와 B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이 표시는 연필이 화면에 남기는 선의 성격을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초보자는 이 기호의 의미를 정확히 체감하지 못한 채 사용한다. 그래서 연필을 바꿔 써도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고 말한다. 실제로는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차이를 느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이다.
H 계열 연필은 단단하다. 연필심이 단단하다는 것은 종이에 닿았을 때 쉽게 닳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선이 밝고 가볍게 나온다. 힘을 주지 않으면 선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특성 때문에 초보자는 H 계열 연필을 답답하게 느낀다. 선을 그렸는데 화면에 남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H 계열 연필의 장점이다.
형태를 잡는 초기 단계에서는 선이 진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선이 너무 진하면 수정이 어려워진다. H 계열 연필은 가볍게 구조를 잡는 데 매우 적합하다. 선이 얇고 정리되어 보여서 화면이 복잡해지지 않는다. 형태가 틀려도 부담 없이 다시 그릴 수 있다. 이 경험을 해 보면, 처음부터 진하게 그리던 습관이 얼마나 작업을 어렵게 만들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반대로 B 계열 연필은 부드럽다. 연필심이 쉽게 닳고, 종이에 닿는 순간부터 진한 선이 나온다. 힘을 거의 주지 않아도 선이 분명하게 보인다. 이 특성 때문에 B 계열 연필은 감정 표현과 명암 표현에 유리하다. 선 하나만으로도 무게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 장점은 동시에 단점이 되기도 한다.
초보자가 B 계열 연필을 처음 사용할 때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처음부터 너무 진하게 그리는 것이다. 선이 잘 보이기 때문에 안심하고 사용하다가, 화면이 금방 지저분해진다. 지우개를 사용해도 흔적이 남고, 종이는 쉽게 상한다. 이 경험은 연필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기 쉽다. 하지만 문제는 연필이 아니라 사용 시점이다.
연필 경도의 차이는 작업 단계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구조를 잡을 때는 단단한 연필이 필요하다. 형태를 확정하고 명암을 넣을 때는 부드러운 연필이 필요하다. 이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면 연필은 늘 불편한 도구가 된다. 하지만 이 흐름을 이해하면 연필은 매우 친절한 재료로 바뀐다.
숫자가 커질수록 성질은 더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2H와 4H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고, 2B와 6B 역시 선의 무게감이 전혀 다르다. 초보자는 이 차이를 한 번에 모두 느끼려고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 연필은 가볍다”, “이 연필은 무겁다” 정도만 구분해도 충분하다. 이 감각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연필 경도를 이해하면 힘 조절에 대한 부담이 줄어든다. 이전에는 손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연필이 그 역할을 대신해 준다. 이 변화는 선 표현을 훨씬 안정적으로 만든다. 손은 덜 긴장하고, 화면은 더 정리된다.
이 파트에서 중요한 점은 하나다. 연필의 경도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역할의 문제라는 것이다. 어떤 연필이 더 좋고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언제 어떤 연필을 써야 하는지가 다를 뿐이다. 이 기준이 생기면 연필 선택은 더 이상 고민거리가 되지 않는다.

Part 3. 연필 선택이 그림 전체 분위기에 미치는 영향과 실전 활용
연필의 차이는 단순히 선이 진하냐, 연하냐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연필 선택은 그림 전체의 분위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 같은 대상을 그려도 어떤 연필을 사용했는지에 따라 화면이 차분해 보이기도 하고, 거칠고 강해 보이기도 한다. 이 차이는 우연이 아니다. 연필의 성질이 화면 전체에 일관되게 반영되기 때문이다.
단단한 연필을 주로 사용한 그림은 전체적으로 정돈된 인상을 준다. 선이 얇고 밝기 때문에 화면이 가볍게 느껴진다. 형태가 명확하게 보이고, 구조적인 느낌이 강조된다. 이런 그림은 안정감이 있다. 초보자가 처음 구조 연습을 할 때 단단한 연필을 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형태가 어긋나도 화면이 크게 망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부드러운 연필을 많이 사용한 그림은 무게감이 느껴진다. 선 하나하나에 감정이 실린 것처럼 보인다. 명암 대비가 강해지고, 분위기가 진해진다. 이 특성은 인물 드로잉이나 감정 표현이 중요한 작업에서 큰 장점이 된다. 하지만 이 효과는 의도적으로 사용했을 때 의미가 있다. 무작정 부드러운 연필만 사용하면 화면은 쉽게 답답해진다.
실전에서 연필을 사용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의 연필만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작업 단계에 따라 연필을 바꾸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좋다. 처음에는 단단한 연필로 형태를 가볍게 잡는다. 그 다음에는 중간 정도의 연필로 선을 정리한다. 마지막 단계에서 부드러운 연필로 명암을 더한다. 이 흐름은 화면을 안정적으로 완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초보자는 종종 연필을 바꾸는 것이 번거롭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 작은 수고가 작업의 질을 크게 바꾼다. 연필을 바꾸는 순간, 손의 부담은 줄어든다. 표현은 자연스러워진다. 이 경험을 한 번이라도 하면 연필 선택을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연필 선택은 종이와도 깊게 연결되어 있다. 같은 연필이라도 종이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표면이 거친 종이에서는 선이 더 많이 걸린다. 매끄러운 종이에서는 선이 미끄러진다. 이 차이를 느끼기 시작하면, 연필과 종이를 함께 고려하는 습관이 생긴다. 이 습관은 작업의 완성도를 한 단계 끌어올린다.
연필을 잘 다룬다는 것은 선을 멋있게 그린다는 뜻이 아니다. 선을 상황에 맞게 조절할 수 있다는 의미다. 어떤 선은 조용해야 하고, 어떤 선은 강해야 한다. 연필의 성질을 알면 이 선택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 자연스러움이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안정감을 준다.
많은 초보자는 “어떤 연필이 제일 좋아요?”라고 묻는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정답이 없다. 중요한 것은 지금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다. 형태를 연습하고 있다면 단단한 연필이 필요하다. 분위기를 표현하고 싶다면 부드러운 연필이 필요하다. 연필은 목적에 따라 선택하는 도구다.

이 글에서 다룬 연필 이야기는 미술 재료 이해의 아주 작은 부분이다. 하지만 이 작은 차이를 인식하는 순간, 그림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이유가 보이기 시작한다. 선이 왜 안정적인지, 왜 불안한지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연필은 가장 기본적인 재료이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재료다. 연필을 이해하면 다른 재료를 이해하는 속도도 빨라진다. 이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미술 재료는 더 이상 어렵고 낯선 대상이 아니다. 표현을 도와주는 든든한 도구로 느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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